カテゴリー「雑記」の記事

Pythonの PySimpleGUIで、カレンダーのフォントサイズを大きくする(備忘録)

2021年8月19日

Pythonインストール先の下にある pysimplegui.pyの、18000行あたりにある def popup_get_date の中の以下のフォントサイズ指定を変更すれば可能。

day_font = ‘TkFixedFont 9’
mon_year_font = ‘TkFixedFont 10’
arrow_font = ‘TkFixedFont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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パチンコ屋の営業自粛強要問題

2020年5月1日

店「まるで魔女狩りだ」客「よほどスーパーの方が危ない」福岡県が休業拒否のパチンコ店名公表

パチンコ屋の自粛要請問題には本当に色々考えさせられる。そもそも緊急事態において危険性の高い行為を禁止することに対して,罰則を設けられない現実には危機管理上問題を感じる。

しかし,そもそもパチンコ屋の危険が特に高いわけでもない。

もしパチンコ屋が感染拡大の脅威となることがほぼ確実だというのであれば,これは法的根拠を整備した上で強制的に営業禁止できるべきで,自粛要請でお茶を濁すというのは,中途半端で政権側の責任逃れにも感じる。現状はそのような強制力に乏しい規定に留まっていて,そうでありながら結局は同調圧力による営業自粛の強要になってしまっている。

ちなみに営業を禁止するとしたら,それに対する補償金を出すことは必ず必要とまでは言えないと思う。開店すれば客が来て儲かる業種なのだから,営業を禁止するのだから補償をしないとならないとなると,「社会に脅威を与えて自分は儲かる」ことに対して金銭を補償しなければならないという話になり,脅しに屈して金を出す意味合いを含むことになる。

ところが,最初に指摘したとおり,パチンコ屋は客同士が対面で話をするものではなく,換気さえできれば密閉,密接にはあたらず,少なくとも飲食店よりはずっとリスクが低い。実際,クラスターが発生したという報告もない。これを営業するなというのは,不要不急の外出を徹底的に禁止させるという意図からならばわからなくもないが,同じく不要不急である外食行為,特に居酒屋が(時間限定ながら)自粛要請されていないことと全く整合性が取れない。パチンコ屋営業自粛という,感染予防上意義の薄い自粛を為政者が鬼の形相で迫るのを見ると,緊急事態に罰則のある営業禁止の権力を為政者に与えることは危険だという話にも一理あるとは思う。為政者だけでなく大衆の中にも,パチンコ屋の営業はクラスターになるものだと強引な解釈して営業自粛を迫ったり,あわよくばギャンブル場たるパチンコ屋に打撃を与えようと躍起になる人が多々いるのも怖い。パチンコ屋がギャンブルであることの問題は新型コロナと関係ない話であって,それは平時にじっくりやるべきことである。緊急時に行う必要性がない。それどころか,今は経済もピンチなのであって,むしろ雇用を守りカネを回す歯車と認識して,ギャンブル嫌いであっても目を瞑るべきだと思う。

2020年5月6日以降も緊急事態宣言を延長する話になっており,それはそれで意味があるように思うが,パチンコを含めて,リスクの低い(クラスター形成の可能性の薄い)活動に対する制限は見直したほうが良いと思う。

余談だが,パチンコ屋の営業自粛が始まってから,インターネットで買える競馬の売り上げが伸びている。競馬の売り上げは国庫や地方自治体に入るけれども,すぐに動くカネではないので,むしろパチンコ屋にそのまま流れていたほうが良かっただろう。

ところで一つ気持ちが悪いのは,権力による営業禁止はするべきでないと考える人の中に,同調圧力も良くないと考える人が多くいるように見えること。現在日本で感染拡大がかなり抑えられているのは,日本人の同調力によるところが大きいと考えてるが,「強制」も「同調圧力」もダメというのは耳障りの良い理想像を追い求めているだけの,無責任な意見だと思う。この先感染はそれなりに制圧できると予想しているが,そうなった場合の原動力は「強制」を代替する「同調力」さらには「同調圧力」なのであって,強制がなかったから良かった,と直ちに褒められるものではないし,むしろ少なくともどちらか一方は必要なものなのだという認識が広まったほうが,現実の社会勉強になるだろうと思う。

備忘録
江川紹子の考察【新型コロナ対策「店名公表」】をめぐる懸念…強権主義の誘惑には抗いたい
【緊急寄稿】新型コロナ問題でパチンコホールがいわれなき批判を受けないために/オオキ建築事務所代表・大木啓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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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한국어 첫걸음

2020年4月27日

(한국어가 어색한 데가 있으면 알려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내가 한국어를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한 것은 1990년의 일이었다. 아주 큰 마음이 있어서라기보다는 영어 공부를 아무리 해도 잘하지 못했던 나의 패자 부활전이라고나 하면 마땅할지도 모른다.

실은 내가 처음으로 한글을 유심히 본 일은 1978년 전후 일이었다. 초등학교 고학년생이었던 저는 같은 반 친구 어머니가 “LABO” 라는 영어 놀이 활동 교실을 주재하는 까닭으로 나의 어머니가 시켜서 그리로 다니게 되었다. 거기는 활동비와 교재를 판매하는 수익으로 운영하고 있었는데 우리 어머니는 영문도 모르고 영어뿐만 아니라 그 LABO 본사가 제작한 다른 언어 교재까지 샀다. 나의 기억으로는 그중에 불어와 한국어 교재가 있었다. 그때 한국어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랐던 내가 그 한국어 교재 표지에 쓰여 있던 한글을 처음 보고 품은 인상은 지금도 잊지 않고 있다. 그것은 이응 글자가 폰트에 따라 차이가 있는 걸 보고 서로 다른 글자로 오인해서 글자가 너무나 세세한 규칙으로 만들어져 있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었다. 즉 돋음체의 이응은 완전한 원형 또는 타원형인 반면, 바탕체의 이응은 맨 위쪽에 조그만 점이 불뚝 나와 있다는 그 차이를 알아본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어이없는 오해였지만 수학이나 자연계를 잘한 나로서는 아무 것이나 꼼꼼하게 보는 성격이어서 그런 발견을 한 것으로 생각한다. 단 그 친구 집 LABO 놀이 활동은 주재하는 선생이 영어를 빼고서는 다 할 줄 몰라서 그 오해를 풀 기회는 없었다. 그 이후 한국어에 대해서는 그냥 “까다로운” 글자를 가진 언어라는 인상만을 1986년까지 가지고 있었다.

그러한 내가 한국어에 대해서 다시 관심을 갖게 된 일은 1986년 일이었다. 대학 입시 때 붙을 엄두도 내지 못했던 도쿄대 이과1류(理科1類)에 붙어 대학생이 된 무렵 스포츠 뉴스에서는 1988년 서울 올림픽 뉴스가 많이 나오고 있었다. 그에 아울러 한국에 대한 화제도 종종 접하게 되었는데 그중 나의 관심을 강하게 끈 것이 한국어가 일본어와 비슷하다는 사실이었다. 자연계 교과는 곧 잘하는 반면 인문계 과목에는 재능이 없어서 영어 성적이 전국평균을 간신히 웃돌던 나는 언젠가는 외국어 하나라도 잘해 보고 싶다는 욕구가 센데 한국어야말로 그것을 실현할 수 있는 언어가 아니냐는 생각을 갖게 된 것이다.

그러나 특별한 목표도 없이 자신이 어떻게 붙은 지도 모르는 대학 생활 초반에는 나는 말 그대로 놈팽이 생활을 지냈다. 학교는 상습적으로 땡땡이를 치고 집에서 뒹굴뒹굴하기만 하는가 하면 마냥 국내 배낭여행만 나서곤 했다. 그런 내가 갈 길이 먼 언어 학습을 계속해 나갈 리가 없었다. 한국어를 제3 외국어 과목으로 한두 번 등록을 해서 확실히 일본인에게는 배우기 쉽다는 것은 알게 되었지만 특별한 노력을 들이지 않은 채 어느새 멀어져 간뿐이었다.

나는 대학교 공부를 안 하는 탓으로 성적이 특출나지 않아서 그때 만 해도 인기가 없었던 건축학과에 진학하게 되었다. 그러나 꼼꼼한 작업이 요구되는 설계도나 예상 완성도 제작 실습을 견디지 못해 일부러 학점을 안 따서 진학을 취소했다. 그다음 해는 지리학과 진학을 지원했지만 성적이 못 미쳐 유급해 도합 2번 유급했다. 그때 3, 4년은 나의 인생 중 가장 우울했던 시기이며 흑역사라 할 수 있는데 그런 시절에 외국어 공부가 어떻게 손에 잡힐 리가 있는가.

도쿄대 입학 4년 후인 1990년에 겨우 지리학과에 진학하게 된 후도 놀고 다니는 생활은 여전했지만, 진학 후 1년째에 조사한 홋카이도 농경마(농사를 지는데 쓰이는 말) 마필 산업에 대한 리포트가 교수진에게서 예상 밖으로 호평을 받아 그것에 힘입어 다음 해에는 졸업논문으로 한국에 관해서 뭔가를 조사해 보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것을 기회로 삼아 한국어도 배울 수 있으리라는 작정이었다. 그러나 인터넷은 고사하고 위성설비를 통해서 하는 해외방송마저 없는 그 시절에 생활감이 있는 외국어를 접하는 일은 영어를 빼고서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한류 붐이 일어나기 한참 전인 그 당시 한국어를 배우려는 사람은 거의 없었고, NHK 한국어 학습 프로그램은 이미 1984년에 시작되고 있었는데 당시 알고 있던 바로는 교과서 판매 수가 다른 언어에 비해서 매우 적은 상태였다. 나는 먼저 자습으로 공부하는 한편 어떤 잡지의 외국인 펜팔 모집에 응모해서 친구를 얻게 되었다. 그 친구는 그 당시 대구 계명대 일본어학과에 다니는 학생이었다. 그 친구의 일어에 비해서 나의 한국어가 훨씬 서툰 상태라 누가 어떤 언어로 어떤 식으로 편지를 썼는지 이제 기억이 안 나지만 하여간 자습과 펜팔로 나의 본격적인 한국어 학습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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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dical Malpractice System in Japan

2015年5月23日

I uploaded a presentation on medical malpractice system in jap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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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国の裁判所が裁判のウェブ中継を開始

2014年9月29日

町村先生のブログで知りました。

中国の一部の裁判所で、全裁判をウェブ中継を始めたようです。刑事、民事、行政全てです(行政訴訟があることにもビックリ)

町村先生のブログでは、広州法院のサイトが紹介されていましたが、ぱっと見には、オープニング影像が華々しい河南法院のサイトがよろしいかと思います。

広州法院のサイトはこちらで、右下の方に、他のライブ配信法院へのリンクがあります。

ライブだけでなく、過去のものも見れるようです。

河南法院の検索で調べたところ、「生命権、健康権、身体権糾紛」という表題のものが結構な数あるのですが、基本的には「誰かが誰かを怪我させた」系統のもののようで、医療訴訟があるのかどうかはこれから見て見ようと思います。

もっとも、これをある程度聞き取るには、まだあと1年ぐらいの勉強が必要という印象です。

傍聴だけできても、記録が見れないのでは研究対象にはしにくいと思うのですが、とりあえず非常に驚いたのでご紹介します。

ついでに言うと、サイトのドメインが、広州は cn ですが、河南は org というのも、統一が取れていなくてびっくり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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